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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복의 타인화된 몸과 타인에 의한 몸
 
 

신체는 미스테리이다. 신체는 생물학적 성장과 노화, 질병과 같은 환희와 쇠락을 겪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성장하고 고통을 겪는다. 인간에게 신체란 물리적으로만 주어지는 존재가 아닌 삶의 과정 중에서 의식과 인식을 통해 공생해야하는 삶의 도구이자 그 스스로가 삶의 주체이기도 하다. 노승복의 작업은 두 개의 축으로 궤적을 그리며 전개된다. 그 중 하나는 신체의 자율성에 대한 탐구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에 의해 성형되고 조종되는 신체에 대한 사유이다. 그래서 신체는 그녀 작업의 도구이자 매체이고 질문의 근원, 아니 질문 그 자체이다.

<육성>노승복은 자신의 신체와 함께, 그리고 신체를 통해 비디오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작업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녀가 다루는 비디오 매체는 퍼포먼스의 관찰자일 뿐, 어떠한 미쟝센의 개입도 허락치 않는다. ≪ 육?성 (肉?聲, 2001) ≫의 비디오 작업을 시발점으로 노승복은 자신의 몸, 특히 ‘눈’을 탐험하는데, 어둠 속에서 빛에 반응하는 홍채의 변화를 극단적인 형식으로 보여준다. 눈 앞에서 스트로보를 터트려 홍채의 불안정한 개폐를 보여주거나 반대로 어둠 속에서 익숙해진 열린 홍채를 찍은 영상은 다소 가학적인 인상마저 받게 된다. 관객들은 아마도 이런 눈의 떨림을 바라보면서 공포감이나 두려움과 같은 심리적인 낯섦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신체의 생물학적 반응을 심리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오히려 물리적인 파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유효할 것 같다. 여기서 물리적인 파장이란, 선험적 경험으로 경험되지 않은 공포와 같은 존재적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 신체를 이용한 예술은 근본적으로 저항의 행위였다. 억압된 신체, 이미지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신체에서 벗어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프랑스의 68세대들의 의지가 바디아트의 출발이었듯, 노승복이 제시한 해체된 신체, 기능이 상실된 눈은 봄-보여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계질서, 욕망, 권력의지에 대한 수줍은 체념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체념의 행위가 만드는 의외의 처연함이 어쩌면 ≪ 육?성 ≫에서 보여주고자 한 몸과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1366프로젝트>≪ 1366프로젝트 ≫ (2003) 는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 익명의 여성이 겪은 사건의 기록사진으로부터 작업이 출발한다. 이 프로젝트는 여성의 전화1366을 통해 전개되는데, 노승복은 남성폭력의 희생자로서 타자화 된 여성의 상처를 주목한다. 그리고 사건의 흔적으로 촬영된 사진 속 피멍이 든 피부를 확대시킨다. 확대된 상처는 피멍이란 구체적 기호(sign)에서 벗어나 추상화(absraction)로 이행한다. 작가는 추상적 이미지에서 너무나 사랑스러운 색, 혹은 집단적으로 확산된 ‘사랑’의 색인 선명한 분홍색만을 확대한다. 사랑스런 분홍색은 상처로부터 채취된 흔적이지만, 동시에 사건에 대한 일종의 은닉이다. 상처라는 구체적 흔적에도 불구하고 ≪ 1366프로젝트 ≫ 속에는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의 훼손은 공공적으로 보여줄만한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훼손된 신체는 사회으로부터 제한된 채 타자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상처 속에서 분홍빛을 발견하고 마치 해독제를 발라주듯 이 분홍색은 폭력의 가학성을 감춰버리고 만다. 수많은 폭력이 은닉되고 되려 아름답게 위장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업에서 신체는 사라지고, 상처는 위장되고 만다. ≪ 1366프로젝트 ≫에서의 분홍색은 그래서 (사회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몸, (사회적으로) 위장된 몸이며 ‘지나친 사랑’, ‘되돌이킬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일 수 밖에 없다.

노승복은 주관적인 신체의 자율성을 탐구한 후 ≪ 객관적인 신체 ≫로 이행한다. 주관적인 몸, 또는 스스로 지각하는 신체의 탐닉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응시,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는 신체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된다. 사회적 신체는 기호화된 다양한 몸짓과 패션을 통해 다층적인 사회적 위치를 매핑(mapping)시켜준다면, 그 이면에는 심리적 신체가 감춰져 있다. 노승복의 서투른 춤추기 ("소심증이 있는 아티스트의 사회생활적응 연습1", 2004)나 노래부르기 ("소심증이 있는 아티스트의 사회생활적응 연습2", 2008)는 사회적 표정, 사회적 기호로서의 몸을 만드는 과정이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신체를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서투른 몸짓이 성공을 위한 훈련도, 욕망을 채우기 위한 단련의 과정도 아닌 존재하기 위한 신체의 사회적 표정을 만들기 위한 ‘생존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 속 자신의 어설픔은 우스꽝스러워서 비장하기까지 하다. 흥미로운 것은, 신체적 자율성을 탐구한 초기 신체 작업에서의 몸짓(빛을 쫓는 눈과 피멍 역시 신체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한 살갗(skin)의 표정이기에 이 역시 큰 의미의 몸짓이다) 에서 느껴지는 가학성(육?성)/피학성(1366 프로젝트)은 추상적으로 제시되었지만 오히려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한 반면, 사회적 표정으로서의 신체는 구체적 이미지의 충실한 기록으로 우리에게 전달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체를 통한 작가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은유하면서 작업내용의 유희적 성격과 달리 페이소스를 감지하게 만드는 ‘심리적 신체’를 드러내고 있다.

노승복은 작업을 통해 몸에 의한 사유, 몸의 이해, (정신적 의지와 다른) 몸의 위반을 낯선 방식으로 기록한다. 작업이 출발하는 지점에 작가 자신의 일상적, 직업적, 사회적, 개인적 위기가 놓여있다. 위기란, 극복하거나 함몰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절대적 갈림길이다. 갈림길은 일종의 운명에 대한 거부나 회한을 불러 일으킨다. 오이디푸스가 테베의 갈림길에 서서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운명을 시험에 빠트리는데, 그가 선택한 운명은 결국 그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채 스스로 눈을 찌르고 맹인으로 길 위를 떠도는 배회자, 방랑자가 된다. 노승복은 작업 안에서 이같은 갈림길로 몰아 세우면서 의식의 불가능성, 되돌이킬 수 없는 어떤 힘에 굴복한 신체를 관찰한다. 작업 안에서 그녀는 신체라는 매개체를 통해 (스스로) 존재하기, (함께) 존재할-수-있음을 실험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일 수 밖에 없다. 특히 객관적 신체에 대한 작업으로 이행하는 시기가 공교롭게도 그녀가 교수사회라는 제도권으로 진입한 후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겠다. 왜냐하면, 바로 이 즈음으로부터 그녀의 질문이 제도적/사회적 영역으로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작업이 주관성에만 집중된 듯 보이나 신체의 보편성으로 독해되었듯이, 최근의 사회적 영역으로의 이동이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집중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녀가 작업 속에 제시하는 신체란, 단순히 실험의 매개체, 또는 사회적 타자의 재현이 아닌 개인과 집단, 주관성과 객관성이 연동하는 경계에 위치한 신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City Beautiful, 2008>지금까지 노승복이 탐구한 신체는 심리적/사회적 복선을 드러냈다면, 최근 작업의 질문은 신체의 확장과 개입이다. 환경미화원으로 분한 작가가 도시 속에 개입하거나 (City Beautiful, 2008) 디지털기술과 신체가 만나면서 발생하는 상호교환적 작업 (Block Game, 2008)으로의 이동은 내면에 몰두했던 지난 작업의 연장이지만, 동시에 외면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체-개입 작업에서 신체는 볾-보여짐이란 현상학적 질문에서 벗어나 도시-장소 속에 잠복하면서 공공조각물을 청소하는 행위를 담는 짧은 비디오를 통해 ‘신체의 지워짐’을 은유한다. 청소라는 이중적 의미 (위생과 제거)는 미화원의 정체성은 물론, 서울의 공공조각의 정체성을 동시에 해체하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 미화원의 ‘지워진’ 사회적 신체와 도시복합체를 구성하는 ‘잊혀진’ 공공조각의 ‘미화된’ 신체를 청소하는 상징적 행위는 전통적 가치관과 비교적 약한 지반 위에 얹혀진 근대성을 희화화한 씻김 굿과 다르지 않다. 참여-신체는 디지털 기술로 완성된 ≪ 블록게임 ≫을 통해 매체 및 조형재료를 확장시킨 인터렉티브 작업이다. 그녀의 실험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오히려 참여자의 움직임에 있다. 우리는 참여자의 움직임에 의해 구체화되고 작업이 완성되는 구성이 보다 가시화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새로운 매체와 기술을 응용하는 것은 작가에게 개척되지 않은 영역을 탐험하는 실험의 원천이다. 신체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다양한 실험 역시 비디오 퍼포먼스의 탈영토화를 수행하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더듬거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현(미술비평)
avantgout6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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