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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works
/ 육성(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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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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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肉-聲)
-“지하” 공간에 대한 경험- |
-- 나의 작업은'지하'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작업실을 지하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낯선 지하 공간에서 지낸 지 어느덧 일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도 이 공간이 주는 축축함과
외부와의 격리, 소리의 울림과 사라짐, 어두움 같은 환경에 완전히 익숙하지 못하다.
내가 지하라는 공간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낯설었을 적에, 무심코 행해진 사소한 행동 때문에
발생되는 일들로 겁먹은 적이 많았다. 말하자면 계단을 내려오는 나의 발자국 소리, 기침 소리, 위층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배수관을 타고 내려오는 소음, 간헐적으로 돌아가는 제습기 모터 소리....
매일 반복적으로 들리는 이 모든 소리들은 갑작스럽게 엄습하듯이 들렸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 당시 나는 지루하고 힘든 반복적인 일상 생활로부터 지쳐 의기소침해 있었으며, 이러한 일들은 나를 더욱 움츠리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환경들은 나로 하여금 강한 호기심과 흥분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였던 반복적인 삶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즉 이러한 지하 공간에서의 생활로 인해 조용한 움직임이 있는 삶
속에, 이미 녹아 있는 존재의 여부를 느끼게 되었다.
비디오 작업<육-성>은 작고 미세한 진동이 있는 삶에 희석된 나의 존재를 더듬는 과정이었다. 소재는 역시
나의 신체로서 평상시에 주목하지 않았던 부위(눈의 홍채, 목젖, 손 씻는 소리, 입 주변)를 촬영하였다. 촬영 당시
나와 렌즈의 거리는 1cm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극미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고, 그 부위에서 비롯되는 미세한
소리까지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이미지는 ‘가공하지 않은 채’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영상으로 편집했다. 한편
소리는 귀에 거슬리게 ‘가공하여’ 반복적인 음향??으로 만들었다.
이 두 가지의 요소는 낯선 공간에서 묘한 긴장감으로 표현되고, 한편 이것이 익숙해짐에
따라 그 긴장감은 나른함으로 전이될 것이다.
(노승복-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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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및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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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혀버린 장관(caged spectacle)-오브제로서의
육체
노승복의 육·성(肉·聲)
--육체corps. 사랑하는 이의 육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야기되는 온갖 상념·두근거림·호기심....1. 그 사람의 육체는 분리되었다. 그의 살갗·눈과 같은 부드럽고 열띤 그
자신의 육체와....목소리, 언제나 목소리.
- 롤랑 바르트/사랑의 단상 중
바르트에 기대어 우리의 “눈”을 바라보도록 하자. 육신의 한 부분으로서 “눈(eyes)”은 전체에서 분리될 수도/되어서도
안되지만,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장관으로서, 미학적 오브제로서의 “눈(gaze, regard)”은 분리될 수 있다.
예컨대 “응시하는 눈(작가/카메라)”에 의한 “눈(eye)”대한 장관(spectacle)이 그것이다.
노승복의 “눈(目)"은 분리되었다. 아니 노승복의 작업에서 “살(肉)-눈"과 “소리(聲)"는
신체에서, 음(音)에서 캐내어지고 적출 되었다. 그러니까 바르트가 낭만적으로 되 뇌인, 우리로 하여금 온갖 상념과
두근거림을 자아내는 “그 사람의 육체와 목소리"는 노승복의 작업에서는 ‘스펙터클한 눈'과 ‘가슴을 때리는
사운드'로 대치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상대방의 육체를 통하여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의 근원을 알고 싶어하고, 확인하려 하고, 그 육체에
자신을 각인하려 하듯이 우리 이미지 소비자(또한 생산자)는 끊임없이 눈을 통하여 몸을, 욕망을, 감각을 확인하려 했고,
그것을 작품에서(으로) 각인 해 왔다. 사방 3cm도 안 되는 조그마한 눈을 통해서, 인간을, 대지를, 우주를 향해
열린 장관(spectacle)을 만들어 왔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니 아이러니컬하다.
그런데 노승복은 이제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이 목적(object)이며, 내용"인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었다. 눈을 시작점으로 해서 밖으로 쏘아 보낸 시선이 아니라, 작가의 눈을 시작점으로 하긴 하되, 카메라의
눈(렌즈)을 통해서 다시 “눈"으로 쏘아 보내진 시선이다. 마치 “그 사람의 육체”를 캐내기 위해서 디밀어진
내시경처럼 그녀의 카메라는 다시 그녀의 안구로, 동공으로 향해져 있고, 그 향해진 시선은 정말 무참하게도 부드러운,
따뜻한, 시시때때로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는, 작은 털에 둘러싸인 “연약한 그것"을 드러낸다. 우리 앞에
스펙터클한 삼면화로 제시한다.
처음 갈색의 영상으로 처리된 생물체(작가의 눈, 작품명「No. 8」)는 엇-박자로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스트로보가
터지는 소리가 과장된 사운드와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이 주름주머니 입구 같기도 하고, 심연의 동굴 같기도 한 연약한
생물은 터지는 스트로보-사운드에 의해 움추려 들기도 하고, 멈칫 뒤로 물러나기도 하고, 끊임없이 불안하게 상하좌우로
흔들린다. 보고 있자니 안쓰럽다. 이 영상은 처음 나타날 때처럼 다시 엇-박자로 안쓰러워 하는 내 가슴을 때리면서
사라진다. 물러난다.
곧 이어 나타나는 희뿌옇고, 파란빛의 영상(「No 9」)은 앞서와는 달리 점차 색채의 강도를 진하게 하면서 동시에
나타난다. 물론 ‘이것도 눈이려니(물론 이것도 누군가의 실제의 눈이다.)'하고 보는데, 마치 수족관의 금붕어가 볼록렌즈
앞에서 방황하고 있는 듯 하다. 이것은 자잘하게 주름 잡힌 입구도 없고, 오직 거대하게 뚫린, 그 가장자리가 예리한
칼에 벼려진 것 같은 구멍만 존재한다. 또, 앞서와는 달리 이미지를 선도하는 가슴을 뒤흔드는 사운드도 없다. 오직
심연 같은 파란색 동공의 움직임만을 고요하게 보여준다.
전시장을 대각선으로 나눠서 1/2의 벽면에 쏘여진 이 거대한 “눈"의 삼면화는 그야말로 말의 사전적 의미에서
“장관, spectacle"이다. 이 스펙터클이 특히 의미 있어 보이는 것은 그것이 눈 밖의 세상의 한 켜,
한 층을 욕망 하면서 떠 낸 것이 아니라, 다시 눈으로, 다시 욕망의 내부로, 그 육체가 내는 소리를 향해 있다는
것. 그래서 현실의 내러티브와 이미지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구성된 스펙터클이 아니라 “사적이고, 미적이며, 심리적인
스펙터클"을 형성해 내려 한다는데 의미가 있는 듯 하다.
“사적이고, 미적이며, 심리적인 스펙터클”은 보는 내내 이 거대한, 장엄한 이미지를 보고 들으면서 시선이 다시 눈의
내부로 향한 것처럼, 이미지의 대상이 된 눈이 카메라의 시선에, 사각의 프레임에 갇혀 버렸다(frame이라는 ‘규정’,
‘정의’, ‘폐쇄’)는 느낌에서 비롯되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열쇠 구멍 속 최초의 장면"에서 보는 “내"가 제외됨으로써 원초적으로 가지게
되는 거세와 결여의 콤플렉스가 이 스펙터클의 이미지에는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말을 바꾸자면 노승복이 보여주는 “눈의
스펙터클”은 그 장면 자체로 사적이고, 미적이며, 심리를 구축하고 있지만, 그 장관 어디에도 그 최초의 장면을 “보는
이(voyeur)”의 심리, 콤플렉스, 결여가 느껴지지 않고, 관람자를 그러한 심리의 동일화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기 때문에 관람자는 자신을 그 곳에 투사하지 못하고 익숙하지 않은 육체의 정경과 소리 ‘밖에’
여전히 있어야 한다.
그녀는 육체가 내는 소리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형태를 띠는가? 그 육체들이 어떤 욕망을 발화하고, 우리의 정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재편성되는 가를 묻기 위하여 새삼스럽게 자신의 육체 속으로, 포스트 모더니티의 포화된 “육체의
담론” 속으로, 이 모든 시각의 문화를 생산해 냈던 원초적 기제인 “눈” 속으로 작정하고 들어간 듯 하다. 그래서
노승복은 이 욕망의 근원, 내 사랑의 대상이며 원인을 ‘응시하고(gaze)', ‘캐내고(scruter)’, ‘뒤진다(fouiller)'.
하지만 그녀가 찾아 낸 것은 모든 관념철학이 그러하듯이, 고전적 미의 이상이 그러하듯이 또 하나의 관념, 완결된 미적
스펙터클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이라는 프레임으로 가둬버린(caged)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와는 반대로 전시장 입구 한 쪽 벽면에 아주 작게 모니터에 영사되는 인간의 기도(氣道)를 찍은 영상(「No 6」)은
아주 리얼(감각의 경험이라는 의미에서)하다.
“눈”의 삼면화와는 달리 이 작품은 작은 모니터를 통해 영상을 봐야 하고, 헤드폰을 사용하여 사운드를 들어야 하는데,
이러한 소박한 장치가 오히려 관람자(향유자)를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면서 또한 그러한 장치에 의해 작품을 내밀하게,
주변 환경과 고립되어서 혼자 집중적으로 감상하게 만든다. 신체의 일부인 기도를 반영(presentation)하기 위해
들이밀어진 카메라에 의해 벌려진 목은 숨 가빠하고, 침을 삼키기 위해 “꺽꺽” 거린다. 이 본능적이고 내밀한 사운드와
병행하여 투사되는 이미지는 육체의 주홍빛 내부, 절대로 낱낱의 기관들로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하고 소소한 육신의
덩어리와 그 내피를 보여준다.
살아 있는 동안 언제고 활동해야 하는 귀중한 우리의 그 기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고 잊어버리고 살고 있고,
귀 기울이지 못하는 우리의 불안정하고 연약한 그 신체의 소리를 노승복은 포착해 내는 것이다.
이 전시를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노승복이 「No 8」, 「No 9」를 통하여 사적이고, 미적이며,
심리적인 “갇혀진 장관”으로서 육체의 한 부분을 프레이밍해서 제시하든, 「No 6」에서처럼 “내밀하고 리얼한 소리와
이미지”로 육신의 한 기관을 관람자로 하여금 겪게 하든 이 모든 행위/작업은 일상 속에서 혹사시키고, 살 부대끼면서도
간과하고 있는 우리의 실체, 육체를 재인식시키고, 그럴 수 있도록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그녀의 작업은 “그 사람(우리)의 육체”를 되돌아 볼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강수미 (작가, 전시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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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복의 눈 이야기
몸과 눈
--학생들과 같이 리지아 클락(Lygia Clark)이 70년대
초에 했던 퍼포먼스를 재연해본 적이 있다. 이 퍼포먼스는 의례 생각하듯이 퍼포머가 있고 관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퍼포먼스에 참여해야만 한다. 한 사람에게 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히고 그 안에 바나나, 토마토, 오렌지
등을 집어넣는다. 눈을 가린 참여자들은 과일을 하나씩 꺼내 만지작거리고 터트리고 먹고 먹여주는 것이 이 행위의 전부이다.
눈을 가리면 마치 세계가 우리 앞에서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 같지만, 시각의 억압은 만지는 대상과 만지는 나 사이에
살아있는 구체적인 느낌을 일깨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타인의 몸에서 마치 내장을 꺼내는 듯한 촉감은 시각적으로
명확한 윤곽을 갖고 있는 신체 대신, 과일의 안쪽처럼 흐물거리고 흩어지는 비정형의 신체를 체험하게 한다. 대상과 나,
남과 나 사이의 경계가 침범당하면서, 나는 외부에 있는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몸에 의해 충족되고 채워지는 ‘주체’의 느낌을 갖게된다. 클락은 이러한 퍼포먼스를 ‘몸의 건축’이라고 불렀다.
노승복의 비디오 작업은 눈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것으로, 방금 설명한 클락의 작업과 비교하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이
작업에서 우리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과일을 내장의 감각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체 기관 일부의 확대된
이미지를 일정하게 주어진 공간 속에서 바라본다. 여기에서는 신체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무매개적, 직접적인 접촉 대신에,
그 사이에 관찰자로서의 절대적 거리가 있으며, 가까이 다가가서 본다고 해도 좁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러한 절대적
거리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물리적 거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봄과 보임의 분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내가
스크린을 보는 것이지만, 은유적으로는 모니터의 눈이 나를 보는 관계가 되는데, 어느 쪽이건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이
명백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이 구경꾼이 이미지를 바라봐야 하는 조건에서는 모두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승복의
이미지들은 특정한 신체기관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조직의 시각적 디테일들이 만들어내는 섬세한 움직임이 내러티브를
대신한다. 또는 여기서 내러티브는 하나의 과학적, 혹은 임상적, 신경생리학적 담론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경꾼이라기보다는
관찰자의 위치에 서게 되며, 관찰자는 스펙터클 소비자, 즉 이미지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구경꾼보다는 현미경이나 천체망원경,
혹은 임상적이거나 범죄학적인 카테고리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의사, 과학자, 경찰의 냉정한 시선은 세부의 특징을
분리하고, 범위를 좁혀나가며, 섬세한 변화를 찾아내고, 그것을 일정한 데이터 속에 편입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눈을 보기
--노승복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바라보는 기관인 눈이다. 하나의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혹은 수학적이고 계량적인 이미지가 그 이미지를 인식하는 기관인 눈의 이미지일 때, 우리는 이
봄-보임의 기묘한 단절 앞에서 더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보는 이미지는 보는 기관이고, 내가
보듯이 저 눈도 본다는 것을 본다. 작가는 정면으로 우리를 응시하는 눈이 아니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눈, 즉 무언가에
반응하거나 관찰하는 눈으로 보이도록 촬영했다. 즉 스크린의 눈 이미지는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 자신의 눈과 아마도
비슷할 것이고, 관객은 그런 생각에 미쳐서야 이 작업이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시작하게 된다. 우선
우리는, 눈이 다치기 쉬운 매우 미세한 조직들로 되어 있으며, 놀랍도록 민감하게 움직이는 기관이고, 투명한 표면으로
연약한 내부를 비치고 있어서 빛의 굴절에 의해 신비로운 색채를 띠게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관찰할 때 이렇게 우리 자신의 눈을 의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거울로 자신의 눈과 마주칠 때조차,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미지 속의 눈과 관객의 눈 사이의 상동성은 이렇게 보는 행위에 대한 반성을 거쳐야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눈들이 이미 그렇게 움직인다. 양쪽 눈 모두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이기 때문에 실제로 비디오 이미지 속의 눈이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그 빛에 반응하는 것과 같은 순간에 관객의 눈도 비슷하게 반응할 것이다. (첫 번째 비디오에서는 스트로보를
터트려서 홍채의 수축 확장을 반복해 보여준다). 또 어둠 속에서 홍채가 열린 눈(두 번째 비디오는 어둠 속에서 적외선
촬영을 한 것이어서 홍채가 활짝 열려있는 모습을 보여준다.)을 보는, 전시장의 관객의 눈도 이에 못지 않게 열려있지
않으면 안된다. 영상에 등장하는 눈은 스트로보의 빛에 반응하며, 관객은 비디오 프로젝터를 통해 전달되는 스트로보의
빛에 반응한다. 따라서 최초의 빛은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매개로 일종의 순환을 하게되고, 보여지는 눈이나 보는 눈이나
눈들은 이 빛을 나누어 받고 있다. 눈은 빛에 노출된 기관이며, 시신경은 즉각 이 빛을 받아들인다. 언어와 같은 문명적
상징체계가 개입하기도 전에 눈은 보이는 세계의 빛을 일단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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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야만
--관찰자로서의 절대적 거리 속에서 눈을 관찰하면서도, 우리의
눈은 생물학적으로 외부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뇌 세포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눈은 오히려 촉각보다도
대상을 아주 빨리 받아들이며, 그만큼 눈앞의 세계를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앙드레 부르통은 눈의 이러한 원시성을 야만적
눈(savage eye)으로 표현했는데, 그렇게 보면 시각은 문명, 재현, 기호보다는 마치 성기와 같이 자연, 실재,
지각에 더 가까운 기관으로 보인다. 아마도 같은 이유에서 다른 감각기관들, 이를테면 혀나 귀를 잘라내는 것보다는 눈을
뽑는 것이 더 많은 두려움을 줄 것이며, 더 참을 수 없으리라는 느낌을 줄 것이다. 이 고통은 물론, 눈이 특별히
신경이 예민한 기관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혹은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욕망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잔인한 심판이나
자학의 묘사들은 거세와 적출을 동일한 것으로 다루기를 좋아하고, 성기와 눈의 등가성을 기술한 역사도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바타이유의 ‘눈 이야기’까지 지겹도록 길게 이어져왔다.
시각 이론이나 시각 자체의 고유한 모순은, 시각을 이렇게 촉각적이고 지각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과, 촉각이나 지각의
직접성과는 다른 매우 이성적으로 매개된, 고도로 문명적인 것으로 보는 것 사이에서 발생한다. 바타이유적 눈, 눈멂을
향한 절망적인 갈구와 데카르트적 눈, 세계를 하나의 체계 속에 배치하는 이성의 기관으로서의 눈은 상반된다. 눈앞의
혼란스러운 세계와 시각에 의한 구획 사이에는 적당한 타협이 없어 보인다. 공중에서 보는 도시의 모습이 하나의 추상적이고
무관심한 그림들이라면, 도시 속을 거니는 사람의 눈에 같은 공간은 아주 혼란스럽게 비쳐질 것이다. 데이터를 내기 위한
관찰은 우리의 눈을 피곤하게 하지만, 우리의 눈이 아무리 육체적으로 지친다고 해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볼’ 것이다.
노승복의 작업이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러한 시각의 이중성 때문이 아닐까한다. 왜냐하면 내러티브를 대신하는
눈의 해부학적 디테일들이 그 눈의 직접적이고 촉각적인 특징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동안, 우리는 동시에 사이보그 같은
기계적 눈, 혹은 다소간 병적인 문명이 집중된 장소로서의 눈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의 거울 속에서 매우
촉각적인 대상을 절대적 거리를 두고 ‘관찰’하지만, 동시에 문명이 퇴적된 장소를 야만적인 상태로 ‘지각’한다.
눈의 거울
--노승복이 시각에 관해, 독수리의
시력보다는 바타이유처럼 눈먼 두더지가 되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각에 대한 장구한 비판적
전통 속에서 어떤 모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전에 했던 ‘자화상’이란 작업은,
자신의 얼굴 앞에 카메라를 놓고 장시간 노출을 주어서, 얼굴 이미지가 점차 없어지는 효과를 얻은 것이었다. ‘시선’이라는
작업은, 두꺼운 투명 아크릴 어딘가에 (눈의 사진을 비롯한) 신체의 부분 사진을 삽입해서 사방에서 비쳐 나오게 한
것이었다. 마치 사방에 편재하는 시선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눈은 숨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설계한 작업이다. 이번
작업에서 눈의 비디오 이미지가 크고 자세하게 드러난 것은 그러므로 일정한 단계를 거쳐 나온 셈이다.
노승복의 작업에서 눈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눈의 이미지들이 점차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요즈음 우리는 어디서나 복제된 눈의 이미지들과 마주친다. 대개는 감시의 눈이거나
욕망하는 응시의 눈이거나 욕망 당하는 눈이다. 그렇게 무의식을 식민화하는 광고의 전략들과 노승복의 작업은 언뜻 보면
비슷하게 보일지 모른다. 노승복의 비디오 눈은 적어도 그만큼 ‘센세이셔널’하며, 그런 면에서 눈을 스펙터클이 찾아간
마지막 장소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내게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센세이셔널한’이라든가 ‘마지막’과
같은 말들과 노승복의 비디오-눈과의 관계이다.
글머리에 소개했던 리지아 클락의 퍼포먼스는 매우 이상주의적인 세계, 거의 육체적 코뮨(몸들의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작업이다. 보는 것 이외에 어떤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유희, 주어진 몸을 리얼하게 느끼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현대 생활에서 거의 종교적 수련 정도에서나 남아 있는 것 같다. 시선의 배반을 통해 ‘순수한 눈’을
회복하려고 하는 노력이 충격자체를 진부하게 만드는데 기여한 것으로 판가름난 시기에, 육체적 코뮨의 이상은 더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눈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은 것은 아닐까? 스펙터클의 시작이자 마지막 장소에
머물러, 센세이셔널하게 센세이션을 느껴보는 것이 더욱 이 막가는 시각 중심의 세계를 현실감 있게 환기하는 것은 아닐까?
박찬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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