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상(靈像)/영상(映像)
--고대 조각의 기원은 더 이상 “현재, 이곳(now, here)”에
있지 않을 누군가의 영(靈)과 상(像)의 흔적(trace)을 벽면에 이미지로 남김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때 그 존재의 외형(像)은 물론이고 영혼(靈)까지를 투사시킨 다고 믿으면서 점토를 덧붙여 따라 그렸던 실루엣은 빛,
즉 “촛불 빛”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까 한 인간, 존재의 靈像은 “광선의 굴절이나 반사에 따라 비추어지는 대상의
모습”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映像으로 이미지화 된 것이다.
어디 조각만 그러한 기원설을 가지고 있는가? 회화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지오토(Giotto di Bondone)는
양치기였고, 어느 날 자신이 돌보는 양이 햇빛 아래 서 있을 때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생긴 그림자를 따라 양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오토에게 있어서도 빛은 양을 재현(representation)할 수 있도록 한 기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래 암실(camera obscura)에서 영상을 고정시키려는 일련의 노력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어 내었다. 근대의 기술적 진보의 산물이며, 개발 당시부터 재현의 기계적 완성이라는 영광과 예술의
하위기제라는 폄하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했던 “사진”은 그 지난한 사진의 역사야 어찌 되었든 광선의
작용에 의해 비추어 지는 대상을 가장 확고부동하게 고정시키고, 그 시간과 공간까지를 증명해 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촛불에 의해 생긴 벽면의 실루엣을 따라 그리든, 자연광에 의해 생긴 그림자를 따라 그리든, 광선의 작용을 기계적으로
일 순간에 고정시켜 대상의 이미지를 얻어내든 이 모든 재현의 방법론의 근저에는 시간을, 기억을, 존재를, 더 심층적으로는
존재의 영(靈)과 상(像)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위치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에
속한 시공간 또한 유한할 수밖에 없고, 유한한 시공간이 초래하는 기억의 단절은 필연적으로 재현의 욕망을 추인(追認)한다.
불사(不死)의 욕망이 존재의 유한성, 시공간의 유한성을 뛰어 넘으려는 욕망이라면, 사진은 이러한 영원성의 욕망을 가장
대리적으로, 그러나 가장 사실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매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렇기 때문에)불사와 영원성의
욕망을 대리하는 사진은 죽음과 연관된다. 사진 찍힌다는 것은 그 시간과 장소에 고정되는(죽는) 것이고, 죽은 자는
사진에 의해 영원히 ‘이미지’로 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의반복(同意反復)적이며, 대상의 부동적 재현인 사진은 그러나 “재현의 정치학”이 내파된 바로 그 지점, 재현의
기계적 완성이라는 바로 그 출발에서부터 공격받을 수 있는 인자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의 디지털 혁명은
이 완고한 “사진의 존재 증명”을 바로 그 사진의 층위에서 기생하면서 구멍내고, 허구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의 영(靈)과 상(像)은 사진이 수행했던 바, 빛(영상)을 가지고 단일하고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이미지”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균질하지 않고 확장된 시공간을 생성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텍스트”로 절합(絶合, articulation)한다.
그래서 문제는 선형적 시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재현이 아니라 비선형적 시간이며, 그 속에서 ‘나’는 어디에, 어떻게
위치 지워지는가 이다.
노승복의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가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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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와 self-portrait
--『카메라 루시다』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했던 “언제나 거기에
있으려는 ‘대상물’의 완강함으로부터 떠오르는 사진의 본질”은 사진은 다른 대상이 아닌 바로 그 대상, 다른 순간이
아닌 바로 그 순간을 선택한다는 것이다.(사진 찍는다.) 여기서 어느 누군가는 이렇게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거기 있으려는 대상의 시, 공간적 완강함을 어느 특정한 정황으로 시각화시키는 것은 회화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이다. 물론 회화도 사진처럼 재현의 층위에서 이야기했을 때, 우리에게 “바로 그 대상, 바로 그 순간”이 제시되기
위해 선택의 상황을 겪는다. 예컨대 세잔느의 <생 빅토와르 산>은 언제나 프랑스의 특정한 산이지만, 어느
바람 부는 날 세잔느가 그 앞에 선 산이며, 세잔느로 하여금 그림 그리게 한 순간의 산인 것이다.(세잔느의 <생
빅토와르 산>이 예로서 선택된 것은 또 다른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본질을 규정하는데 대상과
순간의 “선택(고정)”이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은 사진은 이미지인 한에서 실재의 지표(index)이며, 다른 어떤
것이 끼어 들 수 없는 단일한 프레이밍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세잔느의 산이 그와의 현상학적 응시(gaze)의 과정
속에서(여기서 세잔느의 회화는 사진의 “특정한 시간적” 응시와 만난다.) 재구성된 존재이며, 가령 화폭 안에 들어오기
위하여 몇 개의 나무가, 몇 개의 봉우리가 탈락되거나 첨가된 중첩된 프레이밍이라면, 사진은 파인더 너머 저 곳의 대상과
파인더 배후의 시선(작가)이 응시된 것, 파인더가 프레이밍한 “바로 그 것”인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완강함을 깨트리는 “바로 그 대상, 그 순간의 선택”이라는 사진의 본질은 노승복의 작업으로 오면 약간
당혹스러워 진다.
첫째, 사진과 대상의 의심할 바 없이 투명한 지시 관계는 노승복의 작업에서는 사진에 고착된 이미지가 대상이미지를 재현(representation)하지
않음으로써 “거기에 있었음”으로 지표화 되지 못하고 포기된다. 즉 우리가 사진에 당연하게 기대하고 있는(인식하든 하지
않든) 지시적 속성,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사진을 통해 바로 그 것(곳, 때)에 도달한다고 믿고 있는 그 본질을 그녀는
어떤 의도에서 감추거나, 왜곡하거나, 포기한다. 나는 그녀가 그녀 자신을 찍었다는 사진을 보는데 그녀는 없는 것이다.
아니 완전히 텅 비어 있지는 않다. 장시간 노출에 의해 눌려지고, 짓뭉개지고, 날라 가 버린 빛의 흔적, 대상의 상흔(trauma)이
있다. 완전한 백지 상태의 인화지나 아무런 빛의 상도 맺히지 않은 필름을 가지고 ‘이것은 사진이다.’라고 사기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 사기가 성공한 들 무엇하겠는가? 오히려 그녀에게는 “존재 증명, 부재 증명” 이라는 사진의
오래된 본질, 이제는 낡고 헐거워져 그 어느 누구도 ‘인화지 위의 이미지’, ‘보여진 그 시간의 부재’라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그 사진의 본질이며, 한계이며, 탈주의 지점이 중요한 “작업의 대상이며 욕망의 대상”이 된 듯 하다.
노승복이 사진 작업을 하기 훨씬 전부터, 아마도 사진이 발명된 그 오래 전 역사의 시간에서부터 한 편으로는 사진의
“존재 증명”이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결핍의 지점”인 “대상의 완벽한 지시, 재현”은 사진을 사진이게 하는 주민등록증
같은 것이지만, 사진이 다른 어떤 것으로의 탈주의 선을 그을 수 없는 식별표 인 것이다. 노승복은 이러한 버릴 수는
없지만, 부담스러운 억압의 기제 같은 “사진의 사진 됨”을 벗고, 사진이 좀 더 지시작용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그래서
다른 무엇이 되기를 시도한다.
예컨대 그녀는 뷰 파인더(view finder) 너머에 있어야 할 욕망의 주체, 즉 ‘사진 찍는 자’를 ‘사진 찍히는
자’로써 “일시적 죽음의 구멍(렌즈)” 앞으로 불러 앉힌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이 자신의 셀프 포트레이트를
보여 줄 때, 셔먼의 뷰 파인더 앞에 불려 나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셔먼 자신이나 그녀의 욕망, 욕망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각색된 그녀(사진가로서가 아니라 여성 이미지로서), 사회적 욕망의 메시지이다. 또한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초현실적 사진에서 보여지는 자화상은 소수 집단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아버스의
셀프 포트레이트는 타자를 통한 ‘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고, 셔먼의 자화상은 그녀 자신이 고백하듯이 “나는 진정 내가
아니고 타자의 한 형태이다. 곧 나는 타자"이다. 그리고 노승복은 아버스나 셔먼이 있지 않은 곳, 찾지 않았거나
누락시켰던 그 곳에서 셀프 포트레이트의 질문을 시작한다. 그녀는 아버스처럼 소외된 타자를 대변하지 않으며, 셔먼처럼
자신에게 타자의 “옷”을 입히지도 않는다. 그녀의 카메라 앞에 불려 나오는 것은 “자연인, 한 인간”인 것이다. 노승복은
자신이 카메라 뒤에 서 있을 때 느낄 수 없었던 “죽음의 공포”를 마침내 자신이 카메라 앞에 호명되어 섰을 때, 그
어떤 사회적 옷도 입지 않고 장시간 카메라와 대면하고 있을 때 체험했다고 고백했다. 피사체로서, 대부분의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섰다 하더라도 그닥 “죽음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 다만 그런 언술(사진의 본질에 대한 그 수많은 담론, 바르트의
어머니 추모) 들에 의해 일상적 우리의 지각이 환기되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공감할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카메라
뒤편의 안전지대에서 “하나, 둘, 셋”이라든가 “치즈”를 날리던 시선의 주인이 카메라라는 기계적 시선과 대면했을 때
더 이상 그 현장에는 시선의 지배자로서의 권력이 행사되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기계적 냉정함의 시선과 싸우고 끝내는
“총에 맞는(사진 찍히는)” 전쟁터의 “노승복”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시선의 주인이 아닌 한에서 무엇인가를
욕망 할 수도 없으며, 욕망을 대변하거나 각색할 수도 없다. 그녀는 치유자, 혹은 메신저가 아니라 “환자, 수신자”이다.
둘째, 노승복은 사진의 지시 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음으로써 사진의 본질에 탈주의 선을 그리려 하는 것처럼, 사진의
선형적(linear) 시간 속에서 단절된, “바로 그 시간”, 한 프레임이라는 전제를 부정하고 선적 시간성을 엉클어트린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재”를 말하는 바로 이 시점이 “과거”가 되는 비규정적 시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컷, 컷 컷이 보여주는 분절된, 단편의 순간을 당연시 해왔다면 노승복은 시간을 잘라 내지 못하면서(사실은 그 순간을
끝없이 유보하면서), 노출을 장시간 연장시킴으로써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단일하고 명징한 시간성을 헝클어트리고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찍었다고 하는 사진을 나에게 보여 준다. 하지만 나는 그 사진, 그 일상에서 단절된 사진적 시간에서
내가 보고, 알고 있는 노승복의 어떤 물리적 이미지도 보지 못한다. 거기에는 다만 사물이 아닌 인간 같은 것(사물과
빛의 조작으로 이런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다는 면에서 부동의 사실은 아니다.), 얼굴의 어떤 테두리 같은 것(눈도,
코도, 입도 없는), 대상이 동양의 여자 같은 것(긴 검은머리가 단서이다. 하지만 요즘은 장발의 남성, 트렌스 젠더,
지역적 특성을 지우는 사람도 많으니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등등으로 온통 불확실한 “사진적 사실”들이 존재한다.
이 “사진적 사실” 또한 필름을 통하여 인화지에 고착된 것이라는 한에 있어서 사진적 사실이지 어떤 확고 부동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비 사진적 셀프포트레이트”를 가능하게 하는 매커니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가도 밝히고 있듯이
“장노출”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시간을 뚝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중첩시키고, 연속시키고, 다발화 시킨다.
오해가 없도록 밝히자면, 그녀의 자화상이 물리적 얼굴이미지를 희미하게 하는 방식은 포커스를 빗나가게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죽음을 느끼는”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최대한 카메라 렌즈의 포커스를 맞춘다. 그러나
그녀는 공포의 시간을 즐기듯이(죽음에 직면한 희열,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에 가까운 의미에서)
사진적 시간의 한계를 돌파하여 장시간의 노출을 기계적 매커니즘으로 부여함으로써 대상 이미지를 사진-단절된 시간, 사진-지시(index)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결국 우리가 보는 그녀의 자화상에 그녀는 없지만, 자화상이 포커스 아웃된 그 시간만큼 수많은
그녀를 체험하거나 보고 있는 것이다.
같은 물에 두 번 발 담글 수는 없지만, 물은 물이고, 발은 발이다.
카메라-거울 < 포획
셀프 포트레이트 작품에 한해서, 노승복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그녀의 거울이다.
그러니까 카메라-거울이다.
--라캉의 거울단계(mirror stage)에 대한 설명을 따르자면,
침팬지는 거울 이미지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고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지만, 아이는 계속하여 그 이미지를 자기라고
착각 하면서 계속 거기에 집착한다. 아이의 관심은 자신의 실제 몸뚱이와 거울 속에 비친 몸뚱이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집착하며, 그 몸뚱이와 거울 이미지 속의 환경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몰두한다. 그러니까 아이는 거울에 사로잡혀 있다.(『라캉』,
맬컴 보위 지음, 시공사, pp.43-44)
노승복은 카메라-거울이미지에 집착한다. 그녀는 카메라-거울: “나”(대상)가 형성하는 공간 적 관계에 영향 받고 있으며,
그것은 사진, 영상이 만들어 내는 인식론적 환경을 포획하려 한다. 집착, 사로잡힘은 포획(捕獲, capture: 라캉의
용어로서 이미지의 황홀하고도 매력적인 힘을 표현해 주고, 다른 면으로는 ‘포로’의 개념을 전달하면서 주체를 불구적인
고착에 감금 시키는 이미지의 힘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 위의 책, p.44)으로 대치된다. 노승복은 장노 출 셀프
포트 레이트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포획한다. 초점이 맞은 카메라 렌즈를 장시간 노출시킴으로써 ‘아무것도 비춰지지
않는 표면만을 제공하는 빛이 없는 거울’과도 같은 사진 의 표면적 본질을 드러내고 욕망 하는 것으로서의 사진의 진실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언가 볼 수 있는 구체적 이미지-자화상에 그녀의 얼굴은 없는-를 잃어버리는 대가를 치르
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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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Me-그녀는 어디에 위치 지워 지는가?
--그녀의 사진은 나의 눈을 피곤하게 한다. 아니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의 눈은 무언가 대상을 볼 때 자동카메라의 렌즈처럼 자동으로 초점을 맞춘다. 볼 수 없는 것들은 아예 희미한
곳에 있지만, 가시 거리에 있는 대상을 자신이 보려고 할 때 우리는 별 다른 노력 없이 그 대상의 어느 한 점에 초점을
맞추고 대상의 주변을 그야말로 주변화 시킨다.
그런데 노승복이 보여 주는 인물 사진, 영상을 우리가 볼 때 어디에 초점이 맺혀야 하는지, 아니 초점이 없는 이미지를
어떻게 우리의 눈에 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곤혹스러워 진다. 마치 말의 웅성거림이 스토리나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못하고
나에게 단지 소음에 불과한 것처럼 노승복의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과 비디오 영상은 거의 시간에 의해 뭉쳐진 시각적 소음의
덩어리 같다. 청각적 소리의 엉클어짐을 소음(騷音)이라 한다면, 시각적 장면들의 엉클어짐, 뭉개짐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소상(騷像)?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각적 소상(騷像)이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적 장치라 생각한다. 포스트 모더니티(post
modernity)의 담론 이래로 데카르트식의 단일하고 깨어 있는 명징한 주체는 의심받고, 전복되고, 해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된 자아,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영향받고, 규정되어지는 “나-주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작가군(앞서의
셔먼, 로즈마리 트로켈, 로버트 메이플도프 등등)에 의해 자주 언급되어졌고, 형상화되었다. 헌데 여기서 아이러니컬한
것은 단일하지 않고, 명징하지 않은 “나”에 대한 이미지 처리 방식-인화지에 고착된 방식에 있어서도-은 가장(假裝)은
할지언정 이미지 스스로가 지워지거나 흐려지거나 모호해 지지는 않는다. 예컨대 셔먼이 필름 스틸에서 보여주는 셔먼의
정체성은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성의 “옷”을 입을지언정 그 인화지에 정착된 이미지가 흐려지지는 않는 것이다. 즉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모호함”이지 표면의 차원에서 “모호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노승복의 셀프 포트레이트가 갖는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내러티브가 발생하는 차원에서 “나”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차원에서, 사진적 메커니즘을 극대화시키는 차원에서 “나”의 정체성, “사진의 본질”이라는 정체성을
모호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녀를 찍었다고 하는 사진을 통해 시각적 고통을 느끼고, 누군지
모르는,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난감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노승복이 애초에 초점이 맞춰진 카메라 렌즈를 장노출 시킴으로써 자신의 구체적 얼굴이미지를 날리는 것은 순수하게 시간적
“견딤”을 통해서 이다.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거기에 계속 있었음”, “그 시간의 존재를 증명함”, “그
시간 켜켜이에 내가 있었음”이다. 그러니까 노승복이 최초에 카메라 앞에 앉았던 시간에서부터 그것이 단 5분이든, 10분이든
간에 얼굴 없는 자화상에 고착된 이미지는 그녀가 그 곳, 그 시간에 계속 살았음을 의미하고, 이미지가 있든 없든 거기에는
시시때때로, 무수하게 변화하는 “나”들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필름의 프레임과 프레임들에 또 그 프레임들의
사이(홈통)에 그녀는 있었고, 완결된 이미지는 그 시간만을 증거 할 뿐, 그녀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 지워 지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전시에서 정확하게 초점이 맞은 한 대의 비디오 영상을 통해서만 보여진다.
그녀는 정확하게 초점이 맞아 우리의 눈이 익숙하게 열리는 한 대의 셀프 포트레이트 비디오 영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일련의
포커스 아웃된 것 같은 이미지-사진, 영상들을 제작하면서, 그것들을 나열하면서, 또 다음 작업들을 연계시키면서 자신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전시명이 “make Me"인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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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음에 대하여-주이상스(jouissance)-치유
“욕망은 언명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명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라캉, <에크리>, 804;302)
「덧없음에 대하여(On Transience)」는 프로이트가 괴테 탄생 기념 논문집의 한 부분으로 기고한 것이다.
이 논문은 프로이드가 겪은 일화를 토대로 정신 분석의 실천에서 이론의 긍정적 역할을 고찰한 것이다. 그 일화를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프로이드가 1차 세계 대전 전에 친구인 젊은 시인과 전원을 산책하는 와중에 프로이드 자신은 전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탄성을 연발하는 반면, 그 시인은 “모든 아름다움이 곧 스러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워 했다...자연
풍경뿐만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모든 것이 숙명적인 덧없음 때문에 무가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프로이드의
황홀감을 책망한 것이다. 이에 프로이드는 자연의 덧없는 아름다움에 두 가지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젊은 시인처럼 절망에 빠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곧 스러지는 아름다움이지만, 직관이라는 대체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그 아름다움이 불멸(不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 두 반응에 더하여 이보다 나은 반응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덧없음”자체가 매혹의 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한 요소는 그것이 종래는
“지고 말 것”이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그(녀)가 언젠가는 “죽고 말 것”, “나를 떠나가고
말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고, 내가 생에 집착하는 것은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고 말
것”, “죽고 말 것”, “사라지고 말 것”들이 가지고 있는 “덧없음”은 그 상황이 돌파되기 전에 한해서 언제나 나를
절망시키고, 매혹시키고, 각성시킨다.
이렇게도 말해 볼 수 있겠다. 애초에 없는 것, 언명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욕망하지 않는다. 덧없다고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의식의 상태이건, 무의식의 상태이건 간에 욕망의 어떤 형태로 떠오르지 않는 것, 시지각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하여 덧없다고 느끼지도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욕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라캉이 설파하는 바, “욕망은
언명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명될 수 없는 것”이 된다. “꽃”으로 언명된 그 욕망은 언젠가 스러져 사라지는
것이고, 이러한 과정, 상태, 심리는 언명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숭고(sublime)”는 그 자체를 지시하면서
언명되지만, 언명된 것이 바로 그 “숭고”는 아니며, 예를 들어, 회화에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그림([바닷가의
카퓨친 수도사],1808-10년)이 대자연을 통해 “숭고”를 보여 줄 때, 바넷 뉴먼이 추상 회화를 통해 “숭고”를
시각화했을 때, “숭고”는 바로 그 순간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노승복은 아마도 태생적 한계를 가진 인간,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한 시간을 사는 존재(그것이 작가 자신이든, 우리든,
아니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든.)들의 덧없음, 그리고 덧없음을 표상 하는 시간, 욕망이 지연되는 그 순간들을 즐기고
있는 듯 하다.
앞서 언급한 모든 것. 그녀가 카메라-거울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위안을 찾는 상상계와 카메라 앞에 서서 사진의
허구를 발견하는 상징계를 넘나들 때, “죽음의 공포”와 같은 카메라 앞의 시간을 자신의 구체적 얼굴이미지가 날라 가
버릴 정도로 지속시킬 때, 폴라로이드 사진(일회성)을 슬라이드 필름(일회성에 대한 고착, 집착, 포획)으로 복사 촬영할
때, 자신의 서글픈 눈동자 위에 일종의 상흔처럼 사이언 블루(시간과 미동(微動)의 흔적)를 퍼트릴 때, 그녀는 프로이드가
말한 “덧없음”, 라캉이 말하는 “죽음 직전에 느끼는 희열, 쾌락의 극점”을 경험하고, 그 고통스러운 쾌와 고통의
영도(zero degree)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승복에게 있어서 이러한 모든 덧없음에 대한 매혹, 욕망이 표상 되는 장소는 이미지가 잠시 기생(parasite)하는
곳, 폴라로이드 필름, 슬라이드 필름, 인화지, 비디오테이프이다. 기술적 보존성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아닌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사진과 영상의 태생적 특성이며 한계를 의미하는 면에서 사진과 영상 이미지는 가장 실재적인
듯 하지만, 바로 그 만큼 덧없는 것이다. 아무리 사진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명하더라도 그 사진에는 실재의 어떤
원소, 살덩이, 냄새, 털 한올 끼어 들어 있지 않다. 아무리 그녀가 장시간 노출로 카메라 앞에 앉아 있더라도 그녀를
정의하거나, 그 이미지가 그녀 이게 하는 어떤 실제적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사진은 대상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인 것처럼”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 “~이다.”라고 실체를 끼워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어떤 사진을 통해서 그것을 담론화 시킬 수 있을지언정 “사진의 본질”을 찍은 사진을 볼 수 없다.
마치 이카루스가 진리의 태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의 양어깨 죽지에 붙은 날개의 촛농이 흘러내리고 마침내 추락하는
것처럼 사진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순간 사진을 지워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노승복은 이카루스의 날개를 만들어
단 사람이다. 그 날개는 “나/사진”이라고 하는 진실의 정점을 향해 비상하고 비행하고 추락한다. 추락할지언정 그녀가
나는 이유는 그 과정 자체가 덧없음의 극복이고, 죽음 직전의 주이상스이고, 자신과 작업이 끊임없이 피드백하면서 얻는
치유의 어디쯤이기 때문이 아닐까?
강 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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